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문단 편집) == 사생활 == 프로코피예프는 어린 시절부터 꽤 건방진 성격 때문에 숱한 적을 만들고 다녔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재학 시절에도 보수적인 교수들(특히 [[글라주노프]])의 [[뒷담화]]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건방진 성격은 음악원을 졸업하고 출세한 후에도 정도는 덜해졌을 지언정 계속되었는데, 일찌감치 [[서유럽]]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던 9살 선배 스트라빈스키와도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는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잊을 만하면 촌철살인을 주고받는 등 긴장관계를 형성했지만, 그들은 서유럽 망명 시절 러시아인들로서 표면적인 우정을 유지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소련으로 돌아간 후, 스트라빈스키는 프로코피예프 말년의 음악들에 대해 혹평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라고 보았으며 말년에도 그 평을 바꾸지 않았다.[* 쇼스타코비치에 따르면 프로코피예프는 스트라빈스키만 자신의 필생의 라이벌로 여겼으며, 틈만 나면 그의 뒷담화를 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악우|오랫동안 투닥거리면서 서로 챙겨줬던 정이 있는지]], 죽기 전에는 친구를 통해 미국에 있는 스트라빈스키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한다.] 소련으로 귀국한 뒤에는 15살 후배이자 음악원 후배였던 [[쇼스타코비치]]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제1번(쇼스타코비치)|교향곡 제1번]]으로 막 명성을 얻고 있을 때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15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만큼 내심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모양이다. 프로코피예프는 귀국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대해 묘하게 별로 대단한 음악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비쳤고[* '리틀 말러'라며 비아냥거렸다고도 한다. 근데 [[스트라빈스키]]또한 쇼스타코비치에게 "당신은 그만 말러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라고 똑같이 말러에 비유한 것을 보면 비아냥 거린 것이 마냥 막말은 아니라 통찰을 바탕으로 뼈있는 농담을 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율미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쇼스타코비치도 이에 물러서지 않고 프로코피예프가 신통치 않은 작품을 작곡하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비판했고, 후일 회고록인 '증언'에서는 프로코피예프가 자신의 작품들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버거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고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전쟁기에도 이들은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이런저런 소소한 비판을 주고받았으며, 이런 껄끄러운 관계는 1948년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둘이 사이좋게 폭풍 [[관광]]을 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즈다노프에 의한 대대적인 비난 이후에야 두 사람은 피해의식을 통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정도로 관계가 호전되었다.[* 여러 정황상 쇼스타코비치가 말년의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진심으로 보인다.]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스탈린]]의 죽음으로 초라하게 진행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 얼마 안되는 조문객으로도 참가하여 '의리를 지켰다'. 쇼스타코비치와 비슷하게 [[하차투리안]]과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1948년 이후로 연대 의식을 느꼈는지 그간의 감정을 풀고 그럭저럭 원만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프로코피예프가 워낙 여기저기 갈등을 빚고 다니는 성격인지라 '소련 음악의 세 거장'이 서로 비판을 주고받고 견제하는 사이였다는 서술도 있지만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은 분명히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니다. 즉 프로코피예프만 문제였던 것.] 가족 관계도 소련 귀국 후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일단 소련 성립 후 외국에서 활동할 시기에 [[스페인 왕정 복고|스페인]] 가수 리나 유베라와 한 결혼은 처음에 잘 풀리나 싶었다. 둘 사이에서 장남 스뱌토슬라프와 올레그가 각각 1924년과 1928년에 태어났고, 이들은 프로코피예프가 소련 귀국을 결심했을 때도 그대로 따라갔다. 하지만 소련으로 간 뒤에 이들도 프로코피예프와 마찬가지로 [[현시창]]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는데, 독소전쟁 중에는 정권의 탄압 같은 외적인 난관 외에 프로코피예프 자신의 [[불륜]]으로 인한 내적인 위기까지 닥쳐왔다. [[독일 국방군|독일군]]이 한창 [[모스크바]]를 목표로 맹공을 퍼붓고 있을 때 소련 당국은 외국 외교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동쪽으로 피난할 것을 명령했는데, 프로코피예프는 가족 동반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리나가 아들들과 남겠다고 결정해서 혼자 피난해야 했다. 이 피난 기간 중 프로코피예프는 젊은 여류 작가인 미라 멘델손과 만났는데, 미라와의 관계가 깊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리나와 별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혼까지 가지는 않았고, 프로코피예프도 리나와 아들들에게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종전 후인 1948년에 리나가 스페인으로 망명을 시도했다는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20년 징역을 선고받게 되자, 간신히 이어오던 가족 관계는 거의 [[개박살]]나 버렸다. 그 후 프로코피예프의 가족들은 굉장히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리나는 프로코피예프 사후인 1956년이 되어서야 스탈린 숙청 피해자들이 복권되면서 풀려났고, 1974년에 출국 허가를 받아 소련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리나의 아들들인 스뱌토슬라프와 올레그는 그대로 소련에 살면서 각각 건축가와 미술가로 활동했고, 이후 소련 사회에서 아버지가 복권되는데 나름대로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 다룬 [[http://auditorium.kr/2013/05/훌륭한-예술가이자-형편없는-인간/|훌륭한 예술가이자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글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